최근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여성 경기 출전 자격을 ‘생물학적 여성(biologically female)’으로 제한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올림픽에서 Y 염색체가 검출된 선수가 여성 종목에 출전해 논란이 됐던 사례가 이러한 결정의 배경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 선수는 MTF(Male-To-Female)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여성으로 신고되어 스스로도 여성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검색을 해봐도 그 선수의 정확한 의학적 배경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완전 안드로겐 무감응 증후군(CAIS), 혹은 그와 유사한 간성(intersex) 사례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CAIS는 XY 유전형을 가지고 있음에도 안드로겐 수용체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아, 신체 전반이 여성형으로 발달하는 상태다. 테스토스테론이 존재해도 몸이 그것에 반응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생물학적 성’은 무엇인가. 염색체 기준으로는 남성, 호르몬 반응과 신체 형질 기준으로는 여성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을 생물학적 남성으로 봐야 하는가, 생물학적 여성으로 봐야 하는가.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올바른 인식이란 ‘자연을 그 마디에서 자르는 것(carving nature at its joints)’이라고 했다. 마치 능숙한 도축업자가 뼈와 뼈 사이의 자연스러운 연결부를 찾아 칼을 대듯, 좋은 분류란 세계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경계를 발견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이후 오랫동안 철학과 과학이 분류를 이해하는 방식의 배경이 되어왔다. 20세기에 들어 힐러리 퍼트넘(Hilary Putnam)과 솔 크립키(Saul Kripke)는 이 직관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퍼트넘은 ‘어느 날 발견한 쌍둥이 지구의 투명한 액체는 우리 지구의 물과 맛, 모양, 기능이 완벽히 같지만 화학적 구조가 다를 때, 그것을 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우리가 ‘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맑고 마실 수 있는 액체’라는 기능적 정의가 아니라 H₂O라는 본질적 구조를 가리키기에, 손쉽게 ‘H₂O가 아니므로 물이 아니다’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인식과 무관하게 세계 안에 이미 새겨진 경계를 따르는 범주를 자연종(natural kinds)이라고 부른다.

나 역시 한때 생물학적 성은 이런 의미에서 자연종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젠더 정체성은 사회적 구성물일 수 있어도, 적어도 생물학적 성만큼은 Y염색체 혹은 SRY 유전자의 유무로 깔끔하게 가를 수 있다고. 그런데 간성의 사례들을 들여다보면 그 생각에 조금씩 균열을 일으킨다. XY지만 여성형 생식기가 발달하는 경우, XX인데 남성형 외부 생식기가 형성되는 경우, XX 핵형에 Y 염색체 일부가 전위되어 들어간 경우, 같은 유전형이라도 호르몬 수용체 감수성이나 발생 과정의 차이 때문에 표현형이 제각기 달라지는 경우… 실제 인간 발생학의 지형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훨씬 더 많은 무언가를 품고 있다. 여기서 생물철학자 리처드 보이드(Richard Boyd)의 논의가 흥미로운 출구를 제시한다. 그는 자연종이 반드시 단일한 본질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대신 여러 속성들이 인과적으로 묶여 함께 나타나는 경향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히 실재하는 범주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항상성 속성 다발(Homeostatic Property Cluster, HPC) 이론이라고 불렀다. 성별로 치면, XX 염색체, 난소, 에스트로겐 우세, 여성형 표현형이 대부분의 경우 함께 나타나기 때문에 ‘여성’이라는 범주는 실재하는 묶음이다. 그 묶음은 우리가 임의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인과 메커니즘에 의해 함께 묶인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IOC가 세운 기준의 논리가 선명해진다. IOC는 ‘생물학적 여성’을 판정할 때 Y 염색체의 SRY 유전자 유무를 기준으로 하되, CAIS처럼 안드로겐 수용체가 작동하지 않아 외관상 여성으로 발달하는 경우를 예외로 두어 여성 종목 출전을 허용하였다. 안드로겐 수용체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CAIS 선수는 테스토스테론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이탈하고, 대신 에스트로겐의 영향을 지배적으로 받으며 여성형 표현형과 신체 구조라는 속성 다발들과 강하게 결속된다. 즉, 염색체라는 단 하나의 유전적 지표가 일반적인 묶음에서 어긋났을 뿐, 나머지 생물학적·신체적 속성들이 인과적으로 긴밀하게 묶여 ‘여성’이라는 범주의 항상성을 실재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성이라는 범주는 실재한다’와 ‘여성이라는 범주는 단일한 본질로 정의될 수 없다’는 주장이 서로 모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자연의 마디(joints)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퍼트넘이 생각했던 것처럼 하나의 날카로운 선이 아니라 여러 인과적 속성들이 함께 묶인 부드러운 경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IOC가 이러한 기준을 세운 작업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선 이것을 ‘생물학적 여성의 본질을 공고히 하는 작업‘으로 보는 것은 대단한 오산이다. CAIS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어떤 단일한 기준이 모든 경우의 수를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한다. 또 다른 이들은 이것을 올림픽 진행의 행정적 편의를 위해 세운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작적 정의는 측정 가능성을 확보하는 대신, 그 뒤에 숨은 가치 판단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IQ가 고전적인 사례다. ‘지능은 IQ 검사로 측정된다’고 정의하는 순간 지능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떤 종류의 인지 능력을 가치 있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이 검사 설계 안으로 숨어들어간 것이다. IOC 기준도 같은 구조다. SRY 유전자를 기준으로 삼든,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기준으로 삼든, 그 선택 자체가 이미 ‘스포츠에서 공정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특정한 답을 전제한다.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기준으로 택한다면 그것은 근육량과 지구력이 스포츠 경쟁의 핵심 변수라는 가정을 내포하고, 그 가정은 또 어떤 신체적 우위를 자연적인 것으로 볼 것인가, 어디까지를 허용 가능한 생물학적 다양성으로 볼 것인가라는 더 깊은 질문들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IOC가 이러한 기준을 설정한 것은 스포츠라는 제도가 무엇을 공정하다고 볼 것인가에 대한 가치 판단을 특정한 생물학적 언어로 번역한 것이며, 그 번역 과정에서 무엇이 보이지 않게 되는지를 계속 질문해야 한다.

과학적 잣대가 사회적 가치 판단과 결합하여 제도의 언어로 굳어지는 구조가 의학 전반에도 짙게 깔려 있다. 유전학에서는 대립유전자의 빈도가 1% 이상이면 다형성(polymorphism), 그 미만이면 돌연변이(mutation)로 분류한다. 어떤 변이가 1%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에 매우 가까운 빈도로 존재한다고 하자. 그 변이를 가진 사람이 딱 한 명 더 태어나 빈도가 1%를 넘는 순간, 어제까지 돌연변이였던 것이 오늘부터는 다형성이 된다. 정신의학에서는 이 구조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DSM-5)에서 동성애가 삭제되고, 국제질병분류(ICD-11)에서 게임 이용 장애가 추가되는 식으로, 무엇을 질병으로 볼 것인가는 시대의 사회적 합의와 함께 변해왔다. 최근 ADHD와 자폐증 등을 둘러싼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 담론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주의 패턴과 인지 양식을 가진 사람에게 맞지 않도록 설계된 학교와 직장 시스템이 먼저 있고, 그 시스템에 잘 맞지 않는 뇌를 장애라고 부르는 것이라면, 문제는 뇌에 있는가, 그 뇌를 둘러싼 사회 구조에 있는가? 둘 중 하나로만 답하기는 힘들겠지만, 최소한 질병 범주가 순수하게 자연과학적 사실만으로 세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은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곧바로 이런 반론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심근경색이나 호흡부전처럼 명백히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훼손하는 상태조차도 결국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할 것인가? 그것은 직관적으로도 이상하고, 실제 임상 감각과도 맞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직관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처리하면 논의가 흐려진다.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Ian Hacking)이 제시한 ‘역행 효과(looping effect)’ 개념이 여기서 유용한 구분을 제공한다. 해킹은 인간에 관한 범주는 물리적 대상에 관한 범주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인간에 관한 범주는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ADHD라는 진단 범주가 존재함으로써, 그 진단을 받은 아이가 자신을 다르게 이해하고, 부모와 교사가 다르게 대하고, 학교 시스템이 다르게 설계되고, 그 결과 범주가 가리키는 현상 자체가 변한다. 범주와 실재가 서로를 구성하는 것이다. 반면 심근경색은 역행 효과가 거의 없다. 관상동맥이 막히고 심근이 괴사하는 과정은, 우리가 그것을 심근경색이라고 부르든 다른 이름으로 부르든 변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심근경색은 자연종에 훨씬 가깝다. 호흡 곤란, 극심한 통증, 의식의 붕괴와 같은 경험들은 누군가가 이름을 붙여줬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범주와 현상은 이분법적으로 무조건 상호배타적이거나 그 반대가 아니라 퍼지 논리(fuzzy logic), 즉 스펙트럼적인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심근경색처럼 역행 효과가 거의 없는 범주가 있는가 하면, ADHD처럼 범주화 자체가 현상을 구성하는 데 깊이 개입하는 범주도 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 범주는 자연종 스펙트럼의 어디에 위치하는가, 그리고 그에 따라 어떤 인식론적 주의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캉길렘은 『정상과 병리』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는 ‘병리적 상태’를 생명체가 변화된 환경 속에서 만들어낸 또 다른 형태의 규범성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낫모양적혈구빈혈증(Sickle Cell Anemia)이 대표적인 사례다.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지역에서 낫모양 적혈구 형질은 오히려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어떤 변이가 ‘결함’인지는 그 자체의 속성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그것이 놓인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이것은 진화학적으로도 그렇다. 기후 격변이나 새로운 전염병이 생태계를 흔들 때, 종을 살려낸 것은 정상 형질이 아니라 변이된 형질이었던 경우가 적지 않다. 그렇다면 ‘여기까지는 정상, 여기부터는 교정의 대상’이라고 정의되는 의학의 이분법에 대해서, 우리는 그 경계가 인간이 만든 환경과 얼마나 얽혀 있는지를 계속 물어야 한다.

결국 의학의 토대를 더 정밀하게 마련하기 위해서는 범주의 불완전성을 직시해야 한다. HPC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CAIS 사례를 통해 여성이라는 속성 묶음을 유지시키는 인과 구조가 어디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해킹의 시각에서 보면, 역행 효과가 강한 범주일수록 그 범주를 적용하는 행위가 이미 개입적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하며, 그 인식 없이는 진단과 분류가 곧바로 특정 규범의 강요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처음 제기했던 IOC의 사례로 돌아가보자. 올림픽 경기 출전 자격을 판가름하는 기준 역시 자연의 마디를 그대로 날카롭게 잘라낸 절대적 진리가 되기 어렵다. 그것은 공정성이라는 사회적 가치 판단을 생물학의 언어로 묶어낸 결과물에 가깝다. 자연에는 분명 생물학적 실재가 존재한다. 하지만 플라톤이 상상했던 자연의 마디는 항상 선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으며, 그것이 때로는 우리가 정확히 짚어낼 수 없는 부드러운 경계를 가지고 있음을 정직하게 보아야 한다. 자연의 마디를 자르는 우리의 칼날이 완벽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칼날을 그음으로써 어떤 미세한 결들이 함께 잘려 나가는지를 가늠해보는 것.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정교한 칼날을 발명하는 일이 아니라, 그 칼날을 들이밀기 전에 한 번 더 머뭇거리는 인식론적 겸손일지도 모른다.